터키의 다당제

페툴라 귤렌

터키가 1946년 민주당이 창당되어 다당제로 전환한 것은, 이슬람의 국가에서의 역할 등 터키 정치사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이 때까지도 이슬람은 국가의 통제에 있었지만, 터키에서 효율적인 사회적, 도덕적 힘의 원천으로 남아있었다. 민주당은 공화인민당의 철저한 이슬람 통제를 비판했으며, 수상은 민주당을 무마하기 위해 교육과정에서 이슬람 수업 부활 등 이슬람에 대한 정책을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민주당의 1950년 집권 후에도 세속주의와 비슷한 정책을 취했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에 아랍어 사용을 다시 허용하고 종교활동과 교육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새로운 모스크를 지었지만 세속주의 정책은 지속된 것이다. 이와 같이 민주당은 이슬람의 정치화를 반대하고, 국가의 세속적 성격에 대한 도전을 허용치 않았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서 소개된 터키 형법의 변경을 지지했다. 이는 그 유명한 163조로, 일부라도 종교적 원칙과 신념에 바탕을 두고 사회, 경제, 정치, 사법 체계에 변화를 모색하는 행동은 처벌토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으로 국가의 종교 통제가 강화되고, 그런 통제에 도전하는 이슬람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53년, 민주당은 163조를 더욱 확대하여 개인적, 정치적 이득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처벌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이 법을 통해 국가의 종교 통제가 강화되고, 국가 권력은 종교적 가르침에 기반을 둔 어떤 항의라도 침묵시킬 수 있었다.

1960년 군사 쿠데타로 민주당은 물러나고 정의당이 정권을 이어 받았고, 네지메틴 에르바칸이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당수인 술레이만 데미렐에 의해 거부되었다. 에르바칸은 터키 역사에서 지성을 갖춘 주요 정치인물로, 1969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터키 정치상 이슬람의 역할을 재정립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1] 그는 선거 과정을 통해 제도를 변화시켜 이슬람 집단을 그의 정치적 리더십 하에 통합하고자 했다. 그의 이슬람 성향으로, 163조에 의해 5년 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된다. 하지만 1960년대 말에 터키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대두를 막는 대안으로 이슬람이 제시된다. 미국도 냉전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이슬람 그린 벨트”를 형성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막고자 했다. 이 벨트에는 터키,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전체 이슬람 국가가 포함된다. 이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이제 이슬람 세계는 정치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 정세의 흐름 속에서 에르바칸이 세계 정치 무대에서 점점 높아지는 이슬람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주요 인물이 된다.

에르바칸은 세속주의 자체가 아니라, 터키의 실행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토록 세속주의의 재정립을 원했으며, 국가의 세속적 성격을 규정하고 있으며 국가의 임의적 종교 공격에 이용될 수 있는 헌법 2조의 변경을 주장했다.

1965년 선거에서 AP 당은 (민주당의 후신) 집권하면서 데미렐이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무슬림에 동정적이었으며 그 자신도 금요일 기도에 참석했다. 그는 8년 후 선거에서 공화인민당에 패하고 에제비트가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사람은 종교를 필요로 하며, 종교가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80년의 군사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미국에서 영입한 브레인 투르구트 오잘 교수는, 새로 조국당을 창당하고, 집권한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슬람 교육과 도덕성을 강조하고,[2] 이슬람의 가치와 터키의 민족주의가 결합되는 ‘터키 이슬람 통합’ 이념을 옹호했다. 이 이념에서 이슬람은 도덕의 근원으로 수용되지만 정치적 이슬람은 배격된다. 그 이념에서 이슬람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케말주의, 자본주의와 양립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터키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진입, 민주적 개혁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오잘 행정부 시절이었다. 악명 높은 터키 형법 163조는 민주화 과정의 일환으로 삭제되었다. 이와 함께, 오잘 정권의 경제적 자유화와 성장을 통해 역동적 사업가 계층이 형성되며 또한 정치 엘리트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독립적 신문과 TV 채널이 생기게 된다.[3] 오잘의 조국당은 세계로 향한 경제 프로그램과 보수적 사회 가치를 결합시켰다.

오잘은 암살되기까지 터키가 민주화되고 자유시장으로 나아갈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대통령 시절에 경제 정책이 터키 외교정책의 원동력이 되어, 그는 터키에 대한 외국인 투자의 문을 열고 사업가들이 개척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소련 연방의 붕괴로 터키가 구소련의 신생 독립국가에서 특히 에너지 부문에서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갖게 된다.[4]

오잘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제약은 오히려 환상을 배태한다고 주장하고, 이슬람적 가치로 공산주의와 대적하기 위해 모든 학교에서 이슬람에 대한 의무교육이 시행되도록 하였다.[5] 이 시절에는 국회의원이나 각료의 모스크 참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머리 스카프는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자유권을 근거로 공공장소에서의 착용이 허용되었다. 머리 스카프 착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타투르크가 그것을 이슬람의 최대 상징으로 간주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세속국가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6]

오잘 정부는 대학생의 머리 스카프 착용을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터키 헌법 재판소는 이 결정을 번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생들이 계속해서 머리 스카프를 착용했다. 이 머리 스카프 문제는 터키의 보수적 집단과 근본 세속주의 집단간에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어왔다. 근본 세속주의자는 그 착용을 반 세속주의, 반 케말주의로 보는 한편, 자유적 세속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기본적인 인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머리 스카프 문제는 오잘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주요 산물의 하나로, 이슬람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이 결과, 종교 영역 자체와 경제, 미디어, 자선 활동에서 종교적 네트워크가 확충되었다. 예를 들어, 귤렌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과 같은 이슬람의 목소리가 다양한 라디오와 TV 채널, 신문과 잡지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오잘 정부에서 만들어진 이런 신 공간은 귤렌에 고취된 사람들을 포함 터키의 이슬람 집단에 힘을 실어 주게 된다.[7]

터키의 자유화와 경제적 다변화가 진척되면서 종교계와 소수민족 집단은 공적 영역으로 점차 통합되어 힘과 영향력을 얻게 된다. 이런 현상의 주요 구조는 데르사네로, 이는 대화, 영감을 주는 낭독, 기도에 참여하고 사회화, 토론, 네트워킹을 위한 사회적 공간을 제공하는 회합의 자리이다. 이런 모임의 결과로 새로운 대화의 장이 만들어지고 경건한 무슬림이 고취되었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과 함께 새로운 종교적 자각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독서회가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미친 주요 영향은 사람들에게 시민의 제휴를 형성해주는 연대감, 네트워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종교활동이 다른 사회 영역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8]

에르바칸은 10년 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지만 그의 동료들이 복지당을 창당하고 1991년에 국회에 진출하였다. 5년 후 그는 터키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에르바칸은 자타가 공인하는 실천적 무슬림으로 정치 영역에서 이슬람의 더 많은 역할을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그의 취임과 함께 종교의 정치에서의 역할과 공화주의에서 “정치적 이슬람”의 의미에 대한 공개적 토론이 가열되기 시작했다.[9] 그는 이란의 서구에 대한 저항을 칭찬하고 터키의 나토 탈퇴와 함께, 이슬람식 나토, 이슬람 유엔, 이슬람식 유럽연합, 이슬람 통화의 설립을 약속했다.[10] 더욱이 복지당은 터키 민주주의 비전을 쉬운 종교적 관용구와 전통적 이슬람의 가치와 도덕성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나열했다.[11] 이런 수사법은 터키 사회의 보수적 종교적 집단으로부터 환영 받았지만, 이슬람 국가의 출현을 두려워하는 세속주의자로부터는 강한 반발에 처했다. 에르바칸은 몇 차례에 걸쳐 무슬림 국가를 방문했으며 이는 세속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초래한다.

1997년 “서구 연구 그룹”으로 알려진 고위 군사 위원회는 복지당에 대한 수사를 착수했다. 그 결과에 대해 국가안보회의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위원회를 케말주의 개혁과 특히 세속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파괴적 분리주의자 집단이 세속과 비세속의 경계를 흐려 놓으면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법체계를 약화시키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12] 국가안보회의 산하의 실무 그룹의 보고서 결과, 에르바칸 정권은 소위 “탈근대적 쿠데타”에 의해 퇴진이 강요되었다. 또한 당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그는 5년 동안 공직 활동이 금지되고 당은 폐쇄된다.

국가안보회의는 신 정부가 갖춰야 할 18가지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 조치는 터키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축소하기 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안이 포함된다. 특정 종교 공동체나 종교단체의 금지, 정부 공직에서 “반동적” 인사의 제거, “여성의 머리 스카프와 같은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착용물”에 대한 엄한 규제, 이슬람 활동을 하거나 동조하는 군 간부의 제거 등이다.[13] 일부 분석가들은 1980년의 군사 쿠데타 이후, 터키에서 군부가 정치에서 우위에 있음을 확인해준 사건이기 때문에, 1997년 2월 국가안보회의의 이런 조치보다 터키의 정치활동에서 더 결정적인 조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14] 1998년, 헌법 재판소는 “세속적 공화국의 원칙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복지당을 폐쇄했다. 추방된 당원들은 후속 정당인 미덕당을 창당하고, 국회에서 의석 수를 가장 많이 보유한 정당이 되었다.

1998년 조국당의 당수인 메수트 일마즈는 신 정부의 수상이 되어 공공생활에서 이슬람의 영향의 축소를 목표로 “2. 28 조치”를 단행했다. 이맘 교육 학교에 대한 입학을 제한하고, 교육부에 학교, 대학, 공공 장소에서 머리 스카프의 착용을 금지토록 지시했다. 경찰은 이슬람 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명목으로 20명의 주요 무슬림 사업가를 구속했으며, 앙카라의 검사장은 “종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자영업 협회의 폐쇄를 요구했다.

정치적 부패와 조직범죄와 관련된 수사의 와중에서 1998년 일마즈 정권은 붕괴되고 민주좌익당의 당수인 에제비트가 수상이 되었다. 신 정부는 효과적으로 긴급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인권법을 제정하며,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한걸음 다가가게 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경제적 충격의 여파로 2002년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어,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정의개발당이 (타이프 에르도안 창당) 34%의 지지로 집권했다. 2007년 선거에서, 정의개발당은 종전보다 더 많은 지지율로 (46%) 승리하고 압둘라 귈을 대통령, 에르도안을 수상으로 선출했다.

정의개발당은 온건파, 보수, 친 서구 정당을 표방하고 자유적 시장경제와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주창하고 있다. 영국의 유수한 경제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정의개발당 정부를 터키에서 몇 십 년 이래 가장 성공적인 정부로 평가하고 있다.[15] CIA 국가정보위원회의 전 부회장인 풀러 (Fuller)는 터키가 터키뿐 아니라 현 이슬람 세계에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역동적 이슬람 운동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는 정의개발당이며 다른 하나는 페툴라 귤렌의 비정치적 사회운동을 말한다.[16] 정의개발당은 세속주위 영역 내에서 종교적 믿음을 존중하고 도덕적 가치를 옹호할 것을 약속했다. 정의개발당에게 세속주의는 국가가 종교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또한 귤렌과 그 지지자들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정의개발당의 입장에서 종교는 도덕적,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제도이며, 종교 체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풍토에서 가장 잘 배양될 수 있는 것이었다.[17]

비평가들이 당에 이슬람의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정의개발당이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민주적, 경제적 개혁을 추구하는 정당이라고 에르도안은 주장한다.[18] 그는 중도우파 정당과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하고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함으로써 당의 이슬람 이미지를 완화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개발당은 비세속적 또는 이슬람에 뿌리를 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세속주의자가 아닌 이들을 공직에 채용하고 정부의 계약을 종교적 성향이 강한 기업과 개인에게 발주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2007년, 정의개발당은 모든 대학에서 머리 스카프 착용 금지를 해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치는 세속주의 정당들의 비판을 받으며, 2008년 터키 헌법 재판소에 당의 폐쇄를 요구하는 기소로 이어졌다. 기소 이유는 정의개발당이 “세속주의 반대 활동의 온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터키 헌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2008년 7월 30일 헌법 재판소는 판결을 내려, 정의개발당 해체를 요하는 기소는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5명 찬성, 6명 반대).[19]

이런 간단한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슬람과 국가간의 관계 문제는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출범 이후 지금까지, 또한 이에 앞서 오스만 제국 말기에 터키 정치의 주요 쟁점이었다. 터키 정치에서 이처럼 심한 논쟁을 일으킨 사안은 없으며, 터키의 선거 및 법률 영역에서 계속해서 주요 쟁점이 되어왔다. 이런 역사적 환경 속에서, 페툴라 귤렌이 교육 받고, 그의 사상과 종교적 훈련을 발전시키고, 이맘과 저명한 설교자가 된 것이다. 또한 이제 세계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운동이자, 또한 귤렌이 궁극적으로 터키에 이슬람 국가를 탄생시킬 목적으로 추종자들을 결집시키고 있다고 세속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운동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1] Balci (2008)
[2] Yavuz, Esposito (2003)
[3] 같은 책에서
[4] Fuller (2008)
[5] 이슬람에 대한 의무교육 시행은 1980년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인 케난 에브렌에 의해 교육과정에 포함된 것으로, 오잘은 단지 그 결정을 시행한 것이다.
[6] 아타투르크의 모친과 부인도 머리 스카프를 착용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7] Yavuz, Esposito (2003)
[8] Yavuz (2003)
[9] Cetin (2010)
[10] Mason (2000); Howard (2001)
[11] Cetin (2010)
[12] Howard (2001); Howe (2000)
[13] Cetin (2010)
[14] Aras, Bacik (2000)
[15] 이코노미스트 (05-03-20)
[16] Fuller (2008)
[17] Mecham (2004)
[18] 터키 데일리뉴스 (07-22-2007)
[19] 휴리예트 (07-3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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