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귤렌과 정치인들의 만남

언론에 비친 귤렌과 정치인들의 만남

에제위트와 페툴라 호자

에제위트와 짧게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에게 페툴라 귤렌과의 만남에 대해 물었다. 에제위트는 이 만남이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정치에 대해서가 아니라 종교, 학문, 철학에 대해 서로 생각을 나누었다고 하였다.

에제위트는 귤렌의 책을 언급하며 “종교에는 의문이 있을 수 없으며, 신앙이 우선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과학의 진보를 위해서는 계속적인 의문 제기가 필요하다” 고 하였다며 귤렌이 이에 동감을 표했다고 하였다.

에제위트는 페툴라 귤렌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의 기부로 특히 중앙아시아 터키계 국가에 수 많은 사립학교를 빠른 속도로 개교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 지역에 186개, 터키에는 130개 고등학교나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 기관이 있다며, 이 학교들에서는 높은 수준의 과학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즈미르 야만라르 고등학교의 한 학생이 세계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월드 챔피언으로 선정되었고 지금 미국의 NASA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이 학교들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꾸란 강의로 학습이 운영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터키에 있는 두 개 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며, 이 학교들에서 최신식 생물학, 물리학, 화학, 컴퓨터 실험실을 보았다. 교육은 매우 진지했으며 학생의 옷차림은 이스탄불에 있는 미국 사립학교 로버트 칼리지 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학교도 비슷하다고 하며, 이 지역의 최상급 학교는 바로 귤렌에 가까운 사람들이 설립한 학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업추진에 에제위트는 큰 기쁨을 나타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 학교들은 정말 우수한 학교라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 학교들은 터키계 국가에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터키의 영향력을 높여주고 있다.” 우리는 신앙, 정치, 과학 부문에서 관용과 합의를 필요로 한다. 귤렌 사업은 사회의 합의와 단결을 위한 매우 중요한 발걸음이라 믿고 있다.[악샴, 칼럼니스트 메리치 코야타시, 1995년 6월 18일]

파트와(종교적 해석) 대신, 존중과 타협점을

에르투그룰 오즈콕

수상 관저에서 2주일전 목요일에 이뤄진 만남은 나에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탄수 칠레르 수상은 오랫동안 이런 류의 관계 확대를 추구해왔다. 페툴라 귤렌이 나의 관심을 최초로 끈 것은 “스카프 논쟁”이 있었던 1990년대 초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막 후리예트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던 때로, 터키는 머리 스카프 허용 논란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사회는 매우 긴장된 분위기에 있었으며, 터키의 영향력 있는 신문의 편집장으로서 나 자신 이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전쟁의 완화

바로 그 시점에 여성의 머리 스카프 착용을 주장했던 단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는 점을 알았다.

그 단체는 머리 스카프 문제로 야기된 사회적 긴장 때문에 온화한 정책을 펴기 시작했던 것으로, 조사결과 그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페툴라 선생은 사회가 머리 스카프 문제로 내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단체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은 페툴라 선생의 온화한 정책은 사태 악화를 방지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4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나는 자문한다. “페툴라 귤렌 같은 사람이 사회를 분열시키는 다른 문제에도 화합의 메시지로 개입하는 것이 나쁜 일일까?” [후리예트, 1994년 12월 14일]

배움은 유익하다

타메르 코르크마즈

페툴라 귤렌 선생의 이름을 출발점으로 하여 독실한 무슬림의 한 부문을 낮춰 부른 말로 “페툴라츨라르” (페툴라 추종자)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일간지 후리예트의 한 기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년 7월18-19일, 이 신문은 페툴라 귤렌 선생에 관해 엄청난 오보와 비방으로 가득한 기사를 실었다. 그의 나이, 사상, 결혼상태 등 처음부터 끝까지 허위로 얼룩진 이 기사에서 최초로 “페툴라츨라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던 것이다(신문의 편집장 체틴 에메치가 내가 말한 첫 기사를 썼다). 그 편집장은 1989년 스카프 논란 때, 페툴라 귤렌 선생의 설교에서의 경고를 언급했다. 동년 11 월 편집장은 페툴라 선생을 “단결에 관한 설교에서 가장 훌륭한 인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를 칭찬했다. 요약하면 “페툴라츨라르”, “페툴라츨르크”같은 용어는 후리예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칠레르 - 페툴라 선생 회동에 대해 정치학자 눌 베르긴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터키가 민주국가라면, 이 나라의 정치인과 특히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수 백만 국민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자만, 1994년 12월 17일]

종교와 정치

야우즈 도나트

타리카 (수피교 진리 탐구, 학파)는 터키의 현실로, 과거에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중도 우파 정치가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며, 내부의 당 균형 유지에 이런 현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것을 양보로 보는 것보다, 화해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1980년 9월 12일 이후, 타리카에 압박이 가해져, 수레이만 공동체의 지도자인 케말 카챠르가 체포된다. 무아메르 악소이 교수가 그의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그 당시 많은 비판에 대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리카의 현실에 눈을 감고 정치하는 것은 오도된 것이다.”

터키는 세속국가이다. 큰 정당들이 “일정한 균형”을 고려하지 않고 그 조직 내에서 보수세력을 집결하지 않으면 결국 “과격파”가 득세한다.

외잘과 데미렐은 이런 현실을 잘 인식하여 정치적으로 대응했다. 1970년대. 좌파의 표가 42%에 이르자 민주좌익당 총재 에제위트는 종교와 싸우지 않으려 조심했다... 그의 핵심간부로 종교적 뿌리가 강한 국회의원이 있었던 것이다 (루트푸 도안 등). 미국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다.

1960년대에는 터키에 평화 봉사단 요원이 활동했는데 이 조직은 미국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터키 내 462개 마을에서 공개 조사를 시행했다.

설문조사의 질문들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찾아가는 성인들의 묘가 마을 근방에 있는가?
사는 마을과 이웃 마을에 영향력 종교학자가 몇이나 있는가?
마을 사람은 종교에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가?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단식을 하는가?
지역의 총장(ağa), 도지사(kaymakam), 이장(muhtar) 이나 교사 등이 종교적이 문제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가?
마을에서 공개적인 설교가 얼마나 자주 이뤄지고 있는가?
마을에 비 무슬림이 살고 있는가?
몇 명의 남자들이 매일 모스크에 가는가?
이맘, 지역의 총장이나 다른 유지로부터 유익한 사상이 주어지고 있는가?
마을의 여인들은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맘의 부인이나 교사의 부인을 찾아가는가?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미국인들처럼 조사를 할 만큼 터키의 마을과 마을사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밀리예트, 1994년 12월 14일]

헷갈린 오리가 먼저 바닥으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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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CHP (공화인민당)에 페툴라 선생 논란이 발생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최근의 희생제 종교축제 기간 동안 페툴라 귤렌이라는 종교학자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수상이며 CHP 총재인 히크메트 체틴을 그의 자택으로 방문하고자 했다. 귤렌은 방문을 통해 종교축제를 축하하고자 하였으며 체틴이 받아들여 회동이 이뤄졌다.

이 만남에서 페툴라 귤렌이 체틴 부수상에게 요구한 것이 있는가?

없다. 양측의 발표에 의하면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페툴라 선생의 성명서는 어제 신문에 발표되었다. 잘 짜여진 논리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 손에 이 국가의 운명 또한 내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는 정치 지도자나 행정관리와 나의 회동은 일부에서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만남의 수위, 성격 등을 조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나는 이 나라의 시민이며 은퇴한 정부 공무원이다. 이 만남에 잘못된 것이 없다. 더욱이 회동 요청은 부수상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는 모든 사람이 사심 없이 서로 호의를 교환할 수 있는 종교 축일을 선택해서 회동 일자를 정한 것이다”

무엇이 잘못인가?

체틴 부수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페툴라 귤렌이 아니더라도 “당신을 방문하고 싶다”는 사람의 청을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그들이 거절했다면 인격이 떨어지는가?

세속주의에 대한 경고를 오랫동안 조롱해오던 사람들도 세속주의의 이름으로 이런 정서를 보이고 있지만, 그들은 틀린 장소와 시간에서 대상을 잘 못 잡았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후리예트]

뷜렌트 에제위트와 페툴라 귤렌이 서로 가까워 지고 있다

이스메트 소라크

에유프 잔 기자의 페툴라 귤렌과의 주요 인터뷰는 지난 일요일 자만지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 페툴라 귤렌은 사바흐의 누리예 아크만 기자의 포괄적 질문에 답한바 있다.

누리예 아크만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페툴라 귤렌의 흥미로운 면을 접하게 된다. 그가 만난 사람 중 특이한 한 사람은 민주좌익당 (DSP)의 총재인 뷜렌트 에제위트로, 이 총재는 종전에 수 차례 사바지의 인터뷰를 읽었으며 페툴라 귤렌은 최소한도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전 에제위트는 귤렌과 이야기한 적도 있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만남은 정치적 회동이라기 보다는 시와 지적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지식인간의 만남 형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에제위트는 귤렌에게 그의 시집과 함께 유명한 인도 시인 타고르의 번역집을 주었다.

에제위트는 일간지 사바흐의 누리예 아크만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페툴라 귤렌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그를 만났고, 지난 주 내내 자만지에 게재된 에유프 잔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결과, 그의 사상과 관련 페툴라 귤렌과 가깝게 느끼지 시작한 것이다.

“사업활동 연대협회”에서 개최한 외교 관계 회의와 관련 데데만 호텔에서 금요일 저녁에 행한 연설에서 뷜렌트 에제위트는 자주 귤렌 인터뷰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일부 페툴라 귤렌의 사상을 “진심으로 공유한다”고 말했다. 한편 페툴라 귤렌이 인터뷰에서 어떤 다른 정치인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지만, 두 개의 다른 주제와 관련 뷜렌트 에제위트의 이름을 두 번 언급했다.[후리예트]

귤렌이 말한 내용

페툴라 귤렌은 그의 세계에서 정중하게 “호자 에펜디” (교사, 선생)으로 불리며 다른 집단에서는 조금 야유적으로 “호자”로 불리고 있으며, 자만지와의 지난주 인터뷰에 그는 근본적으로 7가지 사항에 대해 언급했다. 이슬람에 독단론이 설 자리가 없다. 이슬람은 진보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에 광신자나 독단주의가 있듯이, 사회의 세속 영역에 “세속의 광신자”가 있다 (이 용어는 에제위트에게서 인용). 서로 포용적이지 못한 이 두 영역은 터키를 다른 알제리로 만들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 단절은 터키를 고립시킬 것이다. 이맘 가잘리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여 이슬람은 이슬람의 발전이 저해되었다.

실증과학으로부터 멀어져 그 당시 종교만을 가르쳐온 메드레세라는 이슬람 교육기관은 그 위치가 격하되었다. 논란이 되는 “터키 이슬람”이라는 용어는 아흐메트 야사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무슬림 문화는 중앙아시아에 힘입은 바 크다.

페툴라 귤렌의 사상과 행동은 또한 흥미롭다. 위와 같이 요약한 귤렌의 광범위한 논평에서 그는 놀랍게도 복지당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보통 사람이나 기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복지당 반대는 이름을 말하면서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관세동맹에 찬성하고 있다. 터키의 국내정치는 9월 12일 사태로 모든 암벽이 제거되고, 투르구트 외잘 전 대통령의 혁신적 사상과 조치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였으며, 구 소련 붕괴로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서서히 안정을 찾고 있다. 이런 안정화 단계에서 세속주의나 중앙아시아에 대한 뷜렌트 에제위트의 가장 세속적 사고방식은 페툴라 귤렌과 잘 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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