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관련된 터키 문화의 주요 개념

페툴라 귤렌

사다카

터키인의 나눔을 권장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는 사다카 (sadaka)로, “자선”, “희사” 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내세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주는 자선 선물 (즉, 명예, 권력, 사회적 인정 등 세속적 이득의 계산 없이)”로 번역될 수 있다.[1] 사다카를 받는 사람은 특정 종교에 속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자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다카는 보통 물질적이나 금전적인 것으로 해석되지만, 사도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는 동료 무슬림에 미소 짓는 행위 등 어떤 호의 표시도, 주는 사람에 영적 보상을 약속하면서, 사다카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사람은 사다카로 돈, 음식, 물, 옷, 책이나 전문적 지식을 줄 수 있다. 하디스는 여러 차례 사다카에 대해 언급하면서 특히 특정 상황하에서의 희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에 주는 사다카, 금요일이나 라마단 기간 중의 사다카, 메카/메디나/예루살렘에서의 사다카, 몰래 하는 사다카, 자기희생이 따르는 사다카 등은 특히 칭찬받을 행위로 알려져 있다.[2]

사람이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사다카는 현대 터키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관습이다. 오스만 시대에 사다카는 많이 시행되어, 모스크 모금함에 익명으로, 모스크 밖이나 길의 “사다카 바위”에 놓여있었으며, 또는 와크프 (자선 신탁) 대표자나 지방 정부에서 대중에 무료 급식소를 열어 관리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통해 자선이 필요한 사람은 가족의 명예나 개인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3] 오스만 시대의 터키인은 대부분 진심으로 행하는 사다카를 통해 무슬림은 속세의 골칫거리를 피하고, 죽음을 편안히 맞으며, 내세에서의 신분이 올라갈 수 있다는 이슬람 신앙을 믿었다.[4] 탄지마트 시대에 시작하여 터키 공화국 초기에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가속화되었던 서구화 운동으로 세속적, 민족주의적 가치가 획기적으로 생활의 모든 영역에 도입되었지만, 그것들은 아나톨리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정체성과 삶의 원칙을 제공한 이슬람을 진정으로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태퍼는[5] “서구화는 대중 차원에서는 이슬람의 신성한 법을 대신할 수 없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윤리와 종말 신앙에 대한 지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배경에서 사다카같은 많은 이슬람 관습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현대 터키 사회에서 사다카는 여러 상황에서 행해지며, 때에 따라 비종교적 방식으로 치러지기도 한다. 사다카는 지역 모스크의 모금함이나, 숫양이나 암소의 희생 (쿠르반)과 고기를 가난한 사람에 나눠주는 행위 또는 자금의 자선 단체로의 전자송금 등을 통해 이뤄지며 다음과 같은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갖기 전이나, 아이가 태어난 후

여행 전이나 여행 후

계획의 시작 전과 완료 후

악몽을 꾸고 나서, 꿈이 불길하게 해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식이 결혼을 위해 출가하기 전과 결혼식 후

자식이 아이를 낳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부모가 들었을 때와 아이가 태어난 후

아들이 군대 가기 전과 제대 후

신앙심이 깊은 터키인은 집 입구에 사다카 통을 설치하여 집을 나설 때마다 잔돈을 넣을 수도 있다. 또한 속죄나 커다란 재앙을 피한 것에 대해 하나님에 감사의 표시로 사다카를 행할 수도 있으며, 살아있는 사람은 물론 또는 죽은 사람 이름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

와크프 (자선 신탁) 항목에서 광범위하게 다뤄질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은 부모가 죽은 자식들이 사다카를 행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 자식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돌아가신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사다카를 행할 기회를 갖게 된다.

자카트

사다카가 자발적 희사임에 비해, 대부분의 터키인은 종교적으로 제도화된 의무적 자선을 자카트 (zekat)라고 부르고 있다. 자카트는 사람이 가족 부양에 필요한 이상으로 재산이나 돈을 가진 경우, 가지고 있는 전체 재산의 일정 부분을 (1/40) 일년에 한번 가난한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제도이다. 합법적으로 번 재산을 어려운 사람에게 기부함으로써 그 재산에 대한 의무를 하는 것이고 비로소 정화되고 증대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꾸란에서 자선은 후에 커다란 열매를 맺게 해주는 씨 뿌리기로 비유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 재물을 바치는 사람은 한 알의 밀알과 같으니 이 낱알이 일곱 개의 이삭으로 번식할 것이요, 매 이삭마다 백 개의 낱알로 번성할 것이라. 하나님은 그 분이 원하는 자에게 몇 배의 보상을 베푸시니, (자비로) 만물을 포용하고, 전지하시다. (2:261)

터키인의 이슬람은 일반적으로 수니파 해석을 따르며, 여기에서 심신이 건강한 무슬림은 이슬람의 다섯 가지 교리를 수행토록 명하고 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 분의 사도이다”라는 신앙고백, 하루에 5번의 기도, 단식, 성지순례와 더불어, 자카트는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꾸란에서 자카트는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고, 자카트는 이슬람 교리중 하나이기 때문에 자발적 자선 행위가 아니며,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신자는 거부할 수 없다. 꾸란과 하디스에 따르면 자카트의 수혜자인 가난한 사람은 그에 대한 기본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카트의 제공자는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문헌에서 자카트는 사회 구성원간 부의 재분배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며, 또한 절도, 매춘 등 빈곤으로 발생하는 일정한 사회악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상 가난한 사람을 돕는 정기적인 자선활동은 사회의 화합과 번영에 기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적으로 자카트는 공동체의 다양한 부문간 관계를 강화하고 안정을 제공해야 한다. 자카트는 시민정신을 함양시키고, 사회 문제를 풀며, 사회 구성원간 사랑과 우정의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6] 꾸란은 자카트를 의무로 규정하면서 이를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지옥의 불로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다.[7]

두 개의 꾸란 구절에서 (2:117, 9:60) 자카트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어려운 친척과 이웃, 고아, 빈민

빚의 멍에를 진 사람

어려움을 겪는 여행자

해방돼야 할 노예나 포로

자카트 관리자 및 징수원

“그 마음”이 하나님의 “위안을 받아야” 사람

후에 이런 범주를 다시 세분화해서 나누고, 자카트를 통해 자선을 받아야 할 사람들의 범위를 늘리고 결정하였다. 그 결과, 자카트 제공의 일반 원칙은 가운데로부터 (자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변두리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된다. 즉, 무슬림은 자카트를 우선적으로 어려운 친척과 이웃에 주고, 이들이 충족된 후에 다른 어려운 사람에게 주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지역에서의 자카트 분배가 국가적이나 광역지역보다 우선시 된다.

의무적 자카트나 사다카의 다른 형태로 사다카 이 피트르가 있으며, 매년 라마단 종료 후에 시작한다. 이를 위한 기부금은 어려운 사람이 보통 하루 식사에 필요한 돈인 $10-25 사이이며[8], 일정한 나이와 경제적 능력이 있는 무슬림의 의무인 자카트와는 달리, 경제적 능력이 있는 가족 식구는 모두 내야 한다. 사다카이 피트르는 사회의 가난한 사람이 라마단 기간의 종료와 함께 시작하는 주요 축제인 이드 알 피트르를 축하할 수 있도록 공평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자카트는 국가가 세금의 형식으로 징수하였다. 그 이후에는 개인들이 원하는 경우에만 내기도 하면서도 때에 따라 엄하게 징수된 것으로 보인다. 오스만 제국 (13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탄탄한 관료체계에서도 자카트 부과를 위한 공식적인 재산 평가방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얼마나 낼 것인지는 개인의 양심 문제였을 것이다.[9] 20세기 초에 이슬람의 칼리프 제도가 민족국가로 바뀌면서, 많은 이슬람 국가는 자카트 징수를 포기하고 서구의 조세 제도를 채택하였으며 이에 따라 각 시민의 자카트 납부 여부는 공식적으로 각 정부에 맡겨졌다. 터키의 경우, 1930년대에 민족주의/세속주의 정책으로 많은 이슬람 제도가 폐지되면서, 터키항공협회가 (1925년 창설) 시민의 자카트 납부 기관으로 지정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기관의 종교적 연관성의 부족과 더불어서, 비정부 자선단체들이 자카트를 모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대두된다. 실제로 현재 터키에서 자카트는 비정부 자선단체와 전반적인 시민사회의 주요 재원으로 모이고 좋은 일에 쓰이고 있다.

사다카, 자카트나 사다카 이 피트르 행위의 주요 요소 중 한가지는 비밀유지이다.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에서 “왼손은 오른손이 준 것을 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바, 이는 사다카나 자카트는 절대 비밀 속에 행해져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사도 무함마드가 살았던 시대의 서로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작은 사회, 그 당시 공동체 마을의 성격을 감안하고, 또한 함께 살고 일하고 사귀는 같은 사람들로부터 사다카를 받는 이의 명예와 품위를 생각해보면 이런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잘 알려진 터키 속담에서도 선행은 비밀리에 하라는 종교적 동기가 반영되어 있다. “좋은 일을 하고 그 일을 바다에 던져라. 물고기가 모르더라도, 창조주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사다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금조달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부유한 사람이 더 많이 내도록 장려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 역사에서 유명한 일화는 사도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자금을 모을 때 일어난다.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무슬림 공동체에 돈이 점점 필요해지자, 무함마드는 그의 친구들에게 집에 가서 약간의 돈을 가져올 것을 부탁한다. 후에 2대 칼리프가 되는 우마르는 재산의 반을 가지고 왔고, 한편 초대 칼리프가 되는 아부 바크르는 재산 모두를 가져왔다. 아부 바크르에게 가족에는 무엇을 남겼냐고 물어보자, “알라와 그의 사자 (使者)를 남겼다”고 말한다. 이때, 우마르는 이슬람 이상에 대한 충성에서 절대 아부 바크르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이들은 모두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관용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라마단 기간과 두 개의 주요 축제인 이드 알 피트르 (라마잔 바이람)과 이드 알 아드하 (쿠르반 바이람, 희생제)에 행해지는 나눔과 자선의 터키-이슬람 전통은 사다카와 자카트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라마단 기간중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공적을 쌓는 방법의 하나는 일몰 후에 단식을 깨는 이프타르나 단식 시작전 아침식사인 사후르에 손님을 집에 초대하는 일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런 관습은 새롭게 발전하여, 너그러운 주인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대접할 뿐 아니라 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디쉬 키라스(이 대여료, 음식을 먹어주어 감사하다는 뜻으로 주는 선물)로 불리는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가족 단위를 넘어서는 오스만의 와크프라르 (자선단체)와 지방 정부기관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 식사할 수 있도록 야외에 대중용 이프타르 행사를 열었다. 오늘날, 무료로 대중에 공개되는 “단식을 깨는 텐트” (이프타르 텐트)의 전통은 그런 자선 행사가 빈민이나 부자에 서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지방 자치단체의 장들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드 알 피트르 기간 동안 자카트나 사다카 이 피트르를 내지 않는 터키인도 친척, 친구, 이웃을 방문할 때 어린이를 보면 모두에게 조그만 과자 선물이나 돈을 주려고 한다.

쿠르반

“쿠르반 바이람”이나 “희생제”로 알려진 이드 알 아드하 기간 동안, 대부분의 터키인은 세계의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양, 소 등의 가축을 제물로 바친다. 이는 하나님에 순종하여 그의 아들을 희생하는 사도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기념하고, 또한 그의 진실된 뜻을 받아들이고 대신 양을 희생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꾸란 37:102–107). 이런 이슬람의 주요 축제는 성지순례인 하지가 끝나는 시점에 시행되고 있다. 이 축제일에는 나눔과 자선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이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꾸란 (22:28, 34–37)과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에 따라 동물을 희생하는 터키인은 대부분 고기를 세 부분으로 나눠, 각각 빈민 (즉 사다카), 친척과 이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모두 축제에 참가하여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터키인은 동물의 가죽, 뼈뿐 아니라 고기의 대부분을, 분배를 담당하는 시민단체에게 기부하고 있다. 나머지는 가족 식사에 사용하여, 친척과 친구들을 초청한다. 굶주린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음식을 먹고, 가까운 친척 특히 나이든 친척 그리고 친구들이 이 축제일에는 모두 방문하도록 함께 노력함으로써 터키-무슬림의 자선 정신은 라마단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 첫 머리칼을 자른 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축을 희생하여 고기를 빈민에게 나눠주는 (사다카) 전통은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 이전 관습이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키데라고 불리는 이런 전통은 이슬람 초창기에 사도 무함마드가 승인하여 제도화된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사다카가 제공되는 위와 같은 경우에 터키인이 고기를 나눠주는 것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와크프

터키의 나눔의 문화를 반영하는 다른 주요 제도는 와크프 (vakıf, 자선 신탁, 재단)로, 오스만 시대에 (1299–1920) 황금기를 누린, 매우 뛰어난 나눔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아랍어인 와끄프 (waqf)는 “관습법 신탁”이나 “자발적 자선”이라 번역된다. 양도할 수 없는 종교적 자선을 이행하려면,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재정문제를 다룰 능력이 있고, 파산으로 차압의 위험이 없이, 경건한 행위를 하려는 성인은 보통 건물이나 토지 등 재산의 전체 또는 일부를 와크프로 선언할 수 있는 것으로, 무슬림이 종교나 자선 목적에 맞게 기부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결정은 되돌리 수 없어, 와크프를 선언한 사람이 법원에 가서 재산을 다시 소유하려 하는 경우, 법원은 재산이 와크프로 반환, 매매, 기부가 불가하다고 판결한다. 와크프 설정을 위해서는 수혜자를 (가족, 대중이나 공공시설의 특정 부문 등)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와크프를 원래의 목적과 법에 따라 관리할 신탁 관리자나 그 위원회를 지명해야 했다. 와크프의 변경이 이슬람 법과 재단의 목적에 합당한 경우에는 신탁 관리자는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다른 경우에는 판사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특히 자금의 유용 등 와크프의 부적절한 관리는 죄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는 이런 초기 이슬람의 기부는 아랍 무슬림이 7세기에 교류한 기독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10], 대부분의 터키 사람은 그 원천을 이슬람에 돌리고 있다.

와끄프가 꾸란에 특별히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에서 그것을 설치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에서 이 제도는 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카이바르 오아시스에서 토지를 취득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그가 사도 무함마드에게 그 토지를 자발적 기부로 (사다카) 희사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사도 무함마드는 “그것을 공탁시키고, 그 열매는 경건한 목적에 헌정하라”고 말했다.

우마르는 토지가 매매, 상속이 안 된다는 조건과 함께 이 일을 시행하고, 그 수입을 노예 해방, 여행자/손님 접대, 하나님을 위한 일 등 여러 가지의 자선 목적에 사용하였다.[11] 하디스의 다른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알라의 사자는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세가지만 남긴다. 자선, 유익한 지식, 그를 위해 기도하는 자식을 말한다.”[12] 여기에서 “유익한 지식”은 저술된 책이나 제자들을, “자선”은 자선 신탁이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자선 신탁은 오스만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부유한 남녀 신자들이 거대한 토지, 전체 건물 또는 소규모 토지, 집이나 방 한 칸까지 와크프로 지정했던 것이다. 또한 카펫 한 개가 학교나 모스크에 와크프로 지정되거나, 장서나 몇 개의 책들이 와크프로 지정되어 대중에게 공개된 경우도 있었다. 자선 신탁은 오스만 통치하에서 무슬림뿐 아니라 기독교인, 유대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대도시, 주요 정부기관뿐 아니라 지방 도시에서도 수 백 개의 와크프가 다양한 목적으로 생겼다. 일부 와크프는 동물을 위해 만들어져, 따뜻한 곳으로 이동할 수 없는 새들을 보호하고, 병아리를 부화시키고, 집 없는 고양이나 개를 돌봐주며, 가축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다른 와크프는 개인이나 사람 집단을 위해 헌정되기도 했다. 사람과 공익사업이 함께 자선 신탁으로 혜택을 보게 됨으로써, 도로, 학교, 모스크, 수도시설, 대중 목욕탕, 다리, 묘지, 분수 식수대의 건설과 유지에 기부가 이뤄졌으며, 또한 지정된 마을의 학생,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기부가 시행되었다. 무슬림뿐 아니라 기독교인, 유대인 모두 그런 신탁기관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초기 오스만 치하에서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발칸 국가들에서 공공 기능을 수행하고 지역의 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 지역 사람들의 찬탄과 동정을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선 신탁을 통해 현대 국가와 지방정부가 제공하는 많은 봉사활동이 – 의료 서비스, 초등교육, 도로 보수, 깨끗한 수도물의 도시와 마을 공급 등 - 이뤄질 수 있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과는 별도로, 대중이 기부를 시행한 부자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요약하면, 와크프를 통해 사회적 화합이 추진되고 빈부 격차가 줄어 든 것이다.

와크프 전통은 12세기에서 19세기까지 활발히 지속되면서 오스만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수행했다. 와크프는 1910년에 청년 투르크 당이 상공 회의소로 대체하고, 1920년에는 ‘종교 자선 신탁 부’의 관할로 들어가며, 1924년에 ‘자선 신탁 일반 감독청’으로 바뀐다. 이 감독청은 오스만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약 41,000 개의 자선 신탁을 감독하고 터키에서 가장 큰 은행의 하나인 와크프 은행을 (직원이 38,000 명 이상 임) 소유하고 있다.[13]

현재 터키에는 여러 형태의 자선 신탁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금을 국가의 수많은 역사 유물의 복원과 유지에 사용하고, 다른 경우에는 대중에게 재정, 교육, 문화, 보건 부문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의 와크프는, 법적 또는 재무 구조는 다르지만 역할은 비슷한 수 많은 자선단체와 협회로 보완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본다면 와크프 자선의 제도화된 형태는 사다카같은 자선의 자유로운 형태보다 추적하기가 쉽다. 이는 와크프 단체의 활동과 공적은 대부분 법적 서류 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히 조직

와크프 이외에도 아히 (Ahi) 조직은 다른 자선의 예를 보여준다. 아히 조직은 사회적, 종교적 전문가 집단으로, 13세기에 아나톨리아에 나타나서 오스만 제국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직들은 근대 초까지 동부 무슬림의 모든 도시에서 널리 퍼져있던 다양한 활동과 조직인 푸투와 또는 피트얀과 관련된다.[14] 이들은 수피즘과 관련되어 있고, 전문가 집단이라는 두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종의 기사도를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이라 할 수 있으며, 전문가 집단 요소 면에서 그 당시 무두장이의 수호 성인이라 알려진 아히 에브란 (1262년 사망)과 연관되고 있다. 터키에는 다양한 직업별 조직이 있었지만, 이 무두장이 조직은 그 중심적 위치와 확고한 조직 기반으로 지도 단체가 되었다. 아히 에브란의 대리인은 터키 중앙에 위치한 크르셰히르에 살면서 사람들을 조직에 받아들이고, 상징적인 입단식에는 신참자를 둘러싸, 길드의 회원 자격이 있음을 나타냈다. 후에 크르셰히르 무두쟁이 조직의 수장은 모든 직업 길드의 수장이 된다. 이는 전시나 평화 시에 아히 조직의 도움을 받은 술탄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전시에 이들은 전투에 참가하고 대포를 만들기도 했으며, 평화 시에는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다.

아히 조직이 독자적 정치권력을 가진 적은 없지만, 이들은 몽골족의 침입으로부터 도시와 마을을 방어하는 등 국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어떤 경우에는 국가와 대중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여[15], 이 조직은 어느 의미에서는 도덕과 정신 영역을 겸비한 현대의 동업자 단체와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산자나 장인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물질적, 사회적으로 공동체의 안녕에 책임을 지는 지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조직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충성심, 신뢰성, 관용, 정의감, 겸손, 동료 전문가를 돕는 정신, 자발적인 용서.

베레케트

터키-이슬람 자선활동에서 다른 주요 개념은 베레케트(bereket)이다. 이 말은 “물질 세계에서 풍부함과 정신 세계의 번성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유익한 영향력”을 뜻하며[16], 터키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터키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속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면, 풍요가 따른다고 믿고 있다. 예컨대, 누가 가난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주면, 그 돈의 나머지는 풍요로워질 것을 믿는다. 너그러움에서 나오는 이런 풍요 사상은 돈 뿐 아니라 시간, 활동 또는 곡식/음식 등 다른 대상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선행에 시간을 할애하면, 그 나머지 시간은 더 효과적, 생산적으로 사용될 것이라 믿는다.

베레케트의 이런 개념은 다음과 같이 꾸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선을 펼치고 (자기 재산에서, 규정된 의무와 그 이상으로 희사함) 하나님에게 훌륭한 것을 빌려주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하여) 자는, 준 것이 몇 배로 증식될 것이며 또한 명예롭고 풍부한 보상이 따를 것이라. (57:18) [17]

신앙과 관계없이 베레케트는 터키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예컨대 상점 주인이나 점원이 상 거래를 마치고 돈을 주머니나 금전 등록기에 집에 넣으면서 “알라께서 풍요롭게 (축복해) 해주시기를”이라는 말을 한다. 시골에서는 추수기에 이웃을 방문할 때 사람들은 “풍요롭기를!”이라고 말한다.[18]

이와 함께 아브라함은 관용과 환대의 중요한 모범으로 생각되고 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그의 집에는 문이 네 개 있었다 한다. 문은 모두 열려있어 사람들은 식사하기 위해 어느 쪽에서 올 수 있었으며, 집에는 손님이 항상 있었고 음식은 풍부하게 준비되었다. 이런 전설을 바탕으로, 터키인은 손님이 주인에게 풍요와 축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으며, 이런 믿음은 여러 가지 말 표현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다른 집에서 식사 후에 터키인은 부와 축복으로 보상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 식탁이 아브라함 식탁처럼 되기를!”이라고 말한다. 터키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아브라함 식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점을 많이 볼 수 있다.

콤슈루크 (이웃사랑)

관용과 이웃과의 좋은 관계는 터키-이슬람 문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도 무함마드가 이웃과의 좋은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많은 터키인들은 알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을 기억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에게 이웃을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라고 너무 자주 말해, 이웃을 나의 후계자로 지정토록 명령하는 것인 줄 알았다.”[19] 또한

알라의 사도는 말한다. “알라와 최후 심판의 날을 믿는 자는 이웃을 해치면 안 되며, 손님을 너그럽게 접대해야 한다. 알라와 최후 심판의 날을 믿는 자는 좋은 것만 말하든지, 침묵을 지켜야 하나니 (사악하고 더러운 것은 피해야 한다).”[20]

비무슬림 이웃도 무슬림과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 무슬림 학자는 의견을 같이한다. 이는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에 특별히 무슬림 이웃을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일부 전통에서는 사도 무함마드나 그의 가족이 유태인 이웃을 너그럽게 대한 예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21]

현대 터키어의 여러 관용구에서 좋은 이웃의 높은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에는 “집을 사지 말고 이웃을 얻어라!”, “이웃은 그 이웃의 재까지 필요할 수도 있다” 등이 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터키인은 이웃과 좋게 지내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인사하고, 잠깐이라도 말하고, 차나 커피에 초대하고, 휴일이나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집을 찾아가고, 과자나 그 날 만들어진 음식을 접대하고, 가족들의 소음을 최대로 줄인다. 특히 터키의 가정주부는 이웃 주부와 가깝게 지내는 경향이 있어, 그들간에 자주 음식준비, 빵 굽기, 아이 돌보기를 함께 한다. 또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마련된 모금함에 기부하며, 금요예배에 함께 참가, 꾸란을 읽기도 한다.

카르지 하센

카르지 하센 (Karz-i hasen)은 터키 나눔의 문화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이 용어의 문자적 의미는 “훌륭한 대출”로, 쌍방간에 합의된 기간 종료 시점에 무이자로 반환되는 대출을 말한다. 다른 무슬림 사회와 마찬가지로 터키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을 도와 카르지 하센을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상하는 선행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러 꾸란 구절과 사도 무함마드의 전통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행위를 칭찬한다. 한 꾸란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에게 훌륭한 것을 빌려주면, 하나님께서 몇 배로 되돌려 주고 너희를 용서할 지니. 하나님은 모든 것에 보답하고, 모든 것을 아우른다 (인간의 많은 잘못을 용서한다).”[22] 이에 따라 합당한 이유로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받는 사람에게는 세속적 혜택을, 주는 사람에게는 영적 만족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카르지 하센은 사회 통합과 협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회에서 서구식 은행이 주로 통용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터키인은 이를 이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터키인은 월간 청구서를 내거나 차, 집 등을 살 때, 은행으로부터 대출 받는 것보다 가까운 친척, 이웃이나 친구로부터 카르지 하센을 통해 지불하는 것을 좋아한다.

[1] 흥미롭게도 자선의 아랍어인 사다까 (sadaqah)는 진리를 뜻하는 시디끄 (sidq)에서 파생된 말이다.
[2] 하디스의 사다카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은Encyclopedia of Islam 26권의 “사다카” 편 참조
[3] 오스만 시대의 사다카 관행에 대한 추가 정보는 Talha Uğurluel 박사의 역사 강의나 (사만욜루 TV에서 정기적으로 방송됨) 저명한 역사학자인 İlber Ortaylı 박사의 강의/서적참조
[4] 이런 믿음은 İbrahim Hakkı 같은 학자들이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서적은 현대 터키인이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Ibrahim Hakkı, Ruhul Beyan, Istanbul: 1928
[5] Tapper (1991)
[6] Karakaş (2002)
[7] 꾸란의 다음 구절 참조. “하나님이 너그럽게 주신 것에 인색한 자는 그것이 그들에게 큰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라. 그들이 그렇게 아끼는 것을 부활의 날에 그들의 목에 걸게 할 것이니. (세상만물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그렇게 아끼는가?) 하나님이 종국에는 모두 줄 것이며, 너희가 하는 일을 모두 알고 있다. (3:180)
[8] 과거에는 곡물, 대추, 포도 자루도 정식 사다카 이 피트르로 간주되었다.
[9] McChesney (1995)
[10] McChesney (1995)
[11] Ibn Had̲j̲ar al-Askalānī, Bulūg̲h̲ al-marām, Cairo n.d., no. 784. “Waḳf”, Encyclopedia of Islam (EI-2) “Waḳf”
[12] 같은 책에서, no. 783
[13] 추가 정보는 다음 참조. www.tr.wikipedia.org/vakiflargenel mudurlugu (11.05.2008), http://www.vakifbank.com.tr/vakifbank-tarihcesi.aspx or http://www.diyanet-sen.org.tr/article. php?article_id=8. (accessed 11.05.2008)
[14] Cahen C. “Futuwwa.” Encyclopedia of Islam (EI-2)
[15] Ergun (1922)
[16] Collin (1960)
[17] 참조. 꾸란 64:18 “너희가 알라에게 빌려주면 이는 아름다운 행위로, 배로 되돌려 주고 너희를 용서할 지니. 이는 알라께서 너희의 봉사를 기꺼이 받고 항상 너그러우시기 때문이라.”
[18] 터키의 다른 관용구에서는 어떻게 사람의 관용 부족으로 풍요로움이나 축복이 사라지거나 끝나는 지를 묘사하고 있다. “베레케트”라는 말이 다양한 구절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 개념이 터키 문화의 일부로 정착되었음 말해준다.
[19] Al-Bukhari, Adab, 28. Riyad-us-Saliheen (1991)
[20] Sahih Bukhari, Volume 8, Book 73, No. 47
[21] Diyanet İslam Ansiklopedisi, “Komşu,” p. 157
[22] 꾸란 6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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