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툴라 귤렌의 삶

페툴라 귤렌

어린 시절

페툴라 귤렌은 1941년 터키 동부 에르주름 근처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곳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 당시 터키 사람들이 세속적 일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귤렌의 부모는 그를 인근 국립 초등학교에 3년 동안 보냈다. 학교 중간에 이맘이었던[1]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중등학교가 없는 다른 마을의 모스크로 발령이 나게 된다. 그래서 귤렌은 초등학교 중간에 정식 교육을 포기해야 했으며 주로 아버지로부터 비공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학자이면서 이맘이던 아버지는 귤렌에게 이슬람의 기본 지식과 아랍어, 페르시아어를 가르쳤다. 귤렌은 아버지가 독서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꾸란을 읽고, 매일 사도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명상하며, 종교적 시를 낭송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이런 호학정신과 사도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었던 것이다.[2]

귤렌은 그의 어린 시절의 집이 “그 지역의 학식 있고 영적으로 앞서간 사람들 모두의 숙소” 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할 수 있는 학자들을 특히 환영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손님, 특히 학자들은 우리 집을 자주 방문했으며, 가족들은 그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나는 아동, 청년 시절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있어 본 적이 없으며, 그 대신 나이 든 사람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마음과 가슴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3] 이와 같이 학자와 신앙인들과 일찍 접하여, 귤렌은 현대화의 세계에서 정신성과 그 위치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마을의 소녀들에게 꾸란을 비밀리에 가르쳤던 귤렌의 어머니도 귤렌을 교육시켰으며[4], 귤렌의 어린 시절의 영웅이었던 조부도 귤렌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10년 전 아타투르크와 케말주의자 정부는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포함 6개의 원칙을 선포했다. 모스크와 기도는 세속 정부에서 허용되었지만, 터키 역사상 이 시점에는 모든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과 활동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귤렌의 부모는 다른 터키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꾸란과 기도 등 종교의식을 배울 수 있도록 터키의 이슬람 전통을 이어갔다.

그의 어린 시절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다른 교사는 수피즘 스승인 셰이크 무하메드 류트피 에펜디이었다. 귤렌이 사이드 누르시 (Said Nursi,1876–1960)의 저작물을 접하게 된 것은 그와 다른 수피즘 스승들을 통한 것으로, 사이드 누르시는 무슬림은 현대성을 거부하면 안되며 그 탐구를 위해 꾸란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친 설교자였다.[5] 누르시는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수용하면서, 공공생활에서 그들의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현대적 이슬람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누르 운동의 목표는 이슬람과 과학의 결합, 법의 지배 안에서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부 형태로 수용하고, 이성과 계시간의 관계를 나타내어 이슬람 의식을 높이며, 현세와 후세의 구원을 자유 시장경제의 테두리와 양질의 교육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었다.[6] 누르시가 고취한 이런 사상은 귤렌의 초기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후에 귤렌의 가르침과 저서의 초석이 된다.

이슬람 연구와 함께 귤렌은 또한 과학, 철학, 문학, 역사를 열심히 배우고,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 현대과학의 주요 원리를 밤늦게 까지 공부했다. 또한 사르트르, 카뮈, 마르쿠제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루소,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푸슈킨, 다윈, 톨스토이 등의 서양 고전작품, 또한 이슬람, 비이슬람을 포함 동양과 서양 철학의 근원이 되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7]

초기 설교자 시절

십대시절에 귤렌은 누르시 독서회를 알게 되어 열심히 참가한다. 타리까트와 구분하여 학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모인 그런 집단을 제마아트 (cemaat)라고 한다. 제마아트는 터키 특유의 이슬람 자체조직으로 1923년 세속적 공화국이 구성되어 수피즘이 불법화되고 메드레세가 (전통적 이슬람 교육기관) 폐지된 후 생겼다. 제마아트의 출현은 새로운 정권에 도전할 지도 모르는 조직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벗어나기 위한 일환으로 실천적 무슬림이 독서회의 형식을 빌어 이뤄진 것이다. 누르시 독서회의 경우, 주요 토의 화제는 이슬람을 현대와 조화시키기 위해 현 시대의 요구를 이슬람의 지식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제마아트에는 정식 가입 요건이나 가입 의식이 없었으며, 회합을 위해 특별한 건물이나 공간이 필요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 누르시 독서회가 시인 루미나 다른 수피즘 스승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피즘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마아트는 조직 내에서 같은 화제와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8] 이런 공유점이 많아 질수록, 참가자는 제마아트에 더 열심히 참가하며 그 조직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9] 페툴라 귤렌은 누르 제마아트에 참가하였으며, 이는 이후의 그의 삶과 그의 지지자들이 형성할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사실상 귤렌 운동의 사회적 조직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가 청년기에 참가했던 누르 제마아트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누르시 담론의 독자와 청중은 또한 데르사네 (dershanes)라는 주로 대학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만들고,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꾸란과 다른 영적 세계의 서적에 대해 토론했다. 이 데르사네를 통해 “세속적 교육 환경 속에서 종교적 사교의 장의 열린” 것이다.[10] 이런 데르사네에서 학생들은 꾸란과 누르시의 서적을 연구하고 그들 사이에 친교를 쌓았다. 이 데르사네가 만남의 장소로 철학적, 사회적, 종교적 화제에 대한 토론의 장이 된 것으로, 후에 귤렌의 영향으로 설립되는 기숙사와 “광명의 집”의 모형이 된다.

귤렌이 이자젯 (교사 자격증) 이외에는 국립 중등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중등 교육과정을 외부 시험으로 이수했다. 1959년에 이맘 자격 국가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성적을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중요한 자리로 임명된다.[11] 귤렌이 초기 교육을 받은 에르주름은 터키 민족주의 이념 수호에 중요한 중심지로, 역사적으로 아나톨리아와 이란 사이의 대상 이동로에 위치하여 앙카라-이란 간의 주요 철도역이 된다. 터키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코카사스로부터 이주한 사람이 많이 있어, 이 지역은 터키의 이슬람 국경을 동방으로부터 수호하는 (실제의 외부 침입이나 터키 내에 거주하는 동방국가 사람들로부터) 최전방 역할을 자랑하고 있었다. 청년 시절 귤렌은 에르주름에서 ‘공산주의 투쟁 터키 협회’를 이끌었으며 후에는 이란 이슬람의 정치적 위협에 대항하여 이념적 지지를 모았다.<12>[12] 이와 같이 귤렌의 에르주름 시절은 그가 이슬람과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전 생애를 통해 귤렌은 터키 정체성을 강조하고 설교했던 것이다.

청년 페툴라 귤렌은 터키 서부의 다른 국경 도시인 에디르네로 가서 4년간 모스크 지도자로 일하고 군 복무를 마쳤으며 그 후 지역의 다른 도시에 일년간 머물렀다. 에디르네와 그 후 일년간 키르클라렐리에서 그는 교육받은 청년들과 일반 대중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자신의 저녁 강좌와 대담 시리즈를 만들고 개인 및 공동 생활에서 도덕을 강조했다. 1966년, 공화국 초기에 이슬람 종교 문제를 다루기 위해 창설된 관청인 터키 종교청은 귤렌을 터키의 3번째 큰 도시인 이즈미르에 있는 케스타네파자르로<13>[13] 임명하였다. 그는 이슬람 과학 교육, 모스크, 학생회, 기숙사의 관리 및 에게해 지역 설교라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금욕적인 생활방식으로 5년 동안 조그만 오두막에 살면서 직무에 대한 어떤 봉급도 받지 않았다. 이 시절에 귤렌의 교육과 공동체에 대한 봉사의 사상이 싹튼 것이었다. 1969년부터 그는 찻집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에게해 지역의 여러 읍과 마을 등 곳곳을 돌면서 강의했다.

최초 교육기관 설립

귤렌은 케스타네파자르 학교의 관리자와 함께 지역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 중, 고등학교 학생과 대학생을 위한 여름 캠프를 만들었다. 이 캠프에서 역사, 생물 등 일반 과목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역할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한 종교 토론도 가졌다. 귤렌은 또한 무함마드의 삶과 오스만 제국 시대를 환기시키면서, 이들이 이슬람 계율에 충실함으로써 위대함을 성취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강조하곤 했다. 터키가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사람들이 성실하게 이슬람적 삶을 영위하고 하나님을 공공장소에서 인정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14>[14] 국립학교에서는 이슬람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귤렌은 젊은이들이 이슬람 원칙을 배우지 못할 것을 걱정했던 것으로, 여름 캠프는 학령기의 아동에게 일반과목과 함께 신앙을 교육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여름 캠프와는 별도로 1970년대를 시작으로 귤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귤렌이 전에 다닌 적이 있는 누르시 제마아트와 비슷한 새로운 제마아트를 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에 끌린 것은, 수천 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그의 대형 대중 설교와, 녹음되어 터키 전국에 걸쳐 판매된 대중 강의를 통해서였다. 그의 청중은 일부 부유한 사업가와 대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 저소득, 중간소득의 사업가였다.<15>[15] 그들은 그의 강의를 들을 뿐 아니라 재정지원이나 노동을 제공하면서 귤렌의 생각들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다. 누르 운동인 데르사네를 본 따 귤렌은 학생, 그 부모, 기부자들이 “광명의 집”을 설립하도록 도왔다. 여기에서 이슬람 교육이 누르시의 저작물과 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연구되었으며, 이 “광명의 집”은 후에 귤렌의 교육철학을 따라 설립될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수천 명의 교육자의 바탕이 된다. 귤렌의 공동체에 대한 봉사라는 사명을 중심으로 약 백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봉사단체가 귤렌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이 시점이었다.[16]

터키의 청년들이 어떻게 무신론의 공산주의와 유물론 등 과격적, 급진적 이념에 이끌려 왔는지를 잘 알고 있던 귤렌은 설교를 통해 청년들에게 전통적 도덕 가치를 가르치고 그들을 파괴적 사상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점은 집권하고 있던 정의당의 지도자인 에르바칸이 이슬람이 사회주의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국제 정치무대에서 이슬람의 더 많은 역할을 추구했던 때였다. 이런 정치적 배경 속에 페툴라 귤렌도 이 지역의 많은 청년들을 매혹시키고 있었던 급진적 마르크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이슬람 이념을 불어 넣었다. 그는 전투적 무신론과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주 자기의 돈으로 물자를 사서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청년들의 도덕관의 부패를 범죄와 사회 갈등의 원인으로 보고, 그들을 건전하고 생산적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진력을 다 했던 것이다.

 1970년 군사 쿠데타로 이 지역의 청년들에게 불법적으로 종교활동과 강의를 주선했던 이유로 그 지역 무슬림이 체포되었으며 귤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기소 없이 6개월간 억류되었으며, 대중 강연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이즈미르에서의 공직을 떠나 국가인증 설교자의 신분을 갖게 된다. 그는 기부자와 부모들에게 에게해 지역에 학생 수업과 기숙 시설을 설립할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으며, 이즈미르에서 대학생들이 머물면서 공부하고 터키 무슬림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름 캠프와 기숙사를 만들었다.

이 기숙사에서 소 집단의 동성의 학생들이 함께 살면서 공부하고, 꾸란과 누르시의 서적을 읽었으며, 한편 귤렌도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간에 강한 연대감을 형성했다. 학생들은 여기에서 자기 희생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슬람의 가치를 배웠다. 기숙사는 알코올, 마약 사용, 혼전 성 경험이나 공산주의, 초국가적 또는 기타의 급진적 운동에 관여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많은 보수적, 종교적 성향의 부모는 자식들이 터키의 대도시에 대학을 다니는 동안 기숙사에서 살기를 원했다.

이즈미르는 정치적 이슬람이 뿌리를 내린 적이 없는 도시로 사업에 종사하는 중산층은 국가 관료주의의 제약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그 대신 시장 친화적 정책과 친서구적 사상을 옹호하고 있었다. 귤렌의 자유시장에 대한 신념과, 사업가들에게 우선 그들의 사업을 발전시켜 세계적/경쟁적으로 만들고 그 후 번 돈의 일정액을 봉사활동에 지원하라는 귤렌의 주장이 사업가 정신에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기숙사와 사립학교의 재원은 청소년에게 일반 과목과 도덕성의 원칙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귤렌의 주장을 지지한 지역의 사업가들로부터 나왔다. 오늘날 수천 개의 규모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완만한 네트워크로 나타나는 강력한 범국가적 운동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즈미르에서였다.

1972년과 1975년 사이에 귤렌은 에게해와 마르마라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설교자 직책을 맡으면서 교육과 공동체에 대한 봉사 사상을 설교하고 고취시켰다. 그 당시 일반 터키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드물었으며 일부에서는 대부분의 교육은 좌익과 우익의 급진적 정치 성향으로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식이 고등학교나 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부모들은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지만 학교의 심각한 정치적 분위기를 우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귤렌은 소기업주들에게, 학생이 정치적 성향이 배제된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숙사를 건립하도록 장려했다. 이런 시설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귤렌의 봉사 윤리를 지지하는 지역민들이 “학비 보조금” 제도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다시 지역민들이 양질의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귤렌의 봉사 윤리에 영향을 받아 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숙사에 살았던 학생들은 귤렌의 봉사 사상의 주요 옹호자가 되고, 살던 마을로 돌아와 보람된 경험과 기회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들은 지역에서 무역상, 사업가, 전문가가 되었고, 공동으로 기숙사와 다른 봉사 계획을 운영하기 위한 재정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귤렌의 대화와 강의는 오디오 카세트에 녹음되어 터키 전국에 배포되었다. 귤렌은 설교자중에서 처음으로 그의 강의가 터키의 일반 대중에게 오디오, 비디오 카세트로 소개된 것이다. 학생들의 지역내 활동과 새로운 통신 기술이 결합되어 귤렌의 봉사 담론은 터키에 퍼지기 시작한다.

1974년에 귤렌이 마니사로 발령이 나면서 마니사에서도 대입 준비 과정 학원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그 이전에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절대적으로 부유층 가족 출신이었다. 최신식 대입 학원이 마니사에 세워지면서 이제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의 학생들도 광범위하게 대학의 문턱을 넘기 시작한다.

귤렌 학교의 설립

1980년대 초반 오잘 정부의 신자유적 정책과 더불어 사립학교 설립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1982년 최초의 귤렌 학교가 이즈미르와 이스탄불 두 곳에 설립된다. 이를 시작으로 그 이후 20여 년에 걸쳐 귤렌 학교가 수백 개 설립되었다. 터키에서 시작하여 구소련의 터키계 공화국, 그리고 구 소련의 다른 국가, 발칸 반도, 남 아프리카를 거쳐 최종 서구에까지 설립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에서 터키 수상인 에제비트는 연설에서 전 세계에 걸친 귤렌 학교의 중요성과 이 학교들이 터키와 다른 국가의 문화와 안녕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17]

귤렌은 청중에게 일반 엘리트 사립 고등학교에 투자할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서 그는 이슬람의 도덕과 세속적 지식이 융합되기를 원했으며, 이 학교는 국가가 인정하는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하며 교육시 영어를 사용한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치는 유일한 이슬람 교육은 국가가 선정한 교과서를 통해 국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종교 교육 시간이다. 모든 학교와 다른 귤렌 학교는 독립적 단위로 지역의 집단이 관리하고 자금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가이의 말을 빌리면 “덕행의 교육적 네트워크”로[18], 이는 주요 인물들이 제마아트에서 알게되었고, 제마아트 활동에 참여하며 제마아트에서 형성되는 긴밀한 인간관계로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터키 내외의 귤렌 학교의 교장과 교사는 대부분 제마아트와 상당한 관련을 가진 교육자들로, 제마아트를 통해 자격이 있고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네트워크 내에서 봉사가 필요한 곳으로 옮겨지게 된다.

한편, 귤렌 학교에는 귤렌 운동의 참가자도 아니며 페툴라 귤렌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보는 교사도 있다. 하지만 교육을 종교적 봉사로 보는 귤렌에 고취된 교사들의 헌신이 없다면, 이런 우수한 학교가 존재할 수 없다 하겠다. 많은 부모들이 귤렌 학교를 자식을 위한 최선의 교육기관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아가이 (Agai)의 말처럼 귤렌은 지역주민들이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학교를 개설하도록 장려하면서, 제마아트에서의 교육 열풍을 계속 가속화 시켰다. 사람들이 열정적인 교사들과 교육에 투자할 큰 손들을 찾는 것에 제마아트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하는 한편, 페툴라 귤렌은 자신의 교육에 대한 이상을 교육과 현대화에 관심이 있는 더 많은 이들에게 피력할 기회를 얻게 된다.

36살이 되는 1977년에 페툴라 귤렌은 터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게 된다. 같은 해, 수상과 정부의 다른 주요 인사들이 이스탄불에 있는 블루 모스크 금요일 예배에 참여하는 행사에서 귤렌은 설교하도록 초청받기도 했다.

귤렌의 영향을 받은 언론 매체

귤렌은 교육과 봉사의 중요성을 전파시키는 방식의 하나로 그의 교육 사상을 따르는 이들에게 출판업에 뛰어 들 것을 장려했다. 여기에서 다시 오잘 대통령이 도입한 정치적 자유화와 뉴스 매체의 독립과 미검열 정책이 터키에서 개인의 출판업 진출이 가능해진 계기가 되었다. 1979년, 귤렌의 교육 사상에 고취된 일단의 교사들이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교사 재단을 설립하고, 월간 잡지 스즌트(Sizinti)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터키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월간 잡지가 된다.[19] 그 사명은 과학과 종교를 연계시키고, 두 가지가 조화될 수 있으며,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성공적 교육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잡지의 각 호에는 귤렌의 사설이 게재되었다. 또한 수백 개에 달하는 그의 설교가 오디오와 비디오로 녹화되고 주요 주제에 대한 설교 시리즈는 60여 개의 책으로 출판되어 터키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런 자료들은 대부분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인쇄물과 여러 홈페이지의 인터넷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청년을 위한 교육의 한 방식으로 기술의 발달을 활용토록 꾸준히 독려했다. 1982년 오잘 대통령 집권시 헌법에 사회적, 종교적 조직을 더욱 폭 넓게 허용하는 사회 개혁이 도입되었다. 이런 개혁을 통해 종전에 제한되었던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개방되고 전국적으로 종교 부흥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 결과 1980년대에 귤렌의 많은 설교가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되어 널리 퍼짐으로써 그의 봉사 담론은 전국적으로 더 많은 청중들에게 퍼지게 되었다. 1980년대 말에 그의 설교는 수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청중을 끌어 모아 터키에서 유례없는 기록을 이루었다.[20] 이 설교는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되어 전국에 유포되었다.

또한 귤렌 운동 참가자는 전국적 텔레비전 방송국 (사만욜루 TV – STV), 주요 통신사 (지한 하베르 에이전시 – CHA), 터키 최대 발행부수의 일간지인 자만 (10개의 외국어로 번역되며 터키계 국가에 지역의 터키어로 인쇄됨), 몇 개의 주요 잡지와 출판사인 ‘더 라이트’ 등을 설립했다.

성공은 기회의 가장 좋은 광고가 되는 법, 이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귤렌과 그의 사상에 고취된 사람들이 성공하고 있다는 입 소문이 퍼져, 귤렌은 터키 전국의 곳곳에서 연설토록 초청된다. 지역의 단체들도 또한 자기 지역에 귤렌 학교를 개설하려 열심이었다. 예술과 인문학 교육뿐 아니라 귤렌 학교는 학생들이 대학 입학시험과 수학/화학/생물학/컴퓨터 과학 분야의 국내 및 국제 과학 경시대회에 준비하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귤렌 운동으로 설립된 사립학교의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귤렌이 연설과 저작물을 통해 주장했던 점, 즉 사람은 경건한 무슬림이 되면서도 현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귤렌, 비판들의 피뢰침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에 의한 터키 공화국의 설립과 세속주의의 케말주의 원칙으로의 채택 등 세속 공화국으로서 터키의 근대사를 볼 적에, 이 운동의 성장은 어쩔 수 없이 세속 정치권에서 관심과 우려를 자아낼 수 밖에 없게 된다.

 1971년 귤렌의 체포와 6개월 수감을 시작으로 그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정권의 세속주의를 위협한 다는 명목으로 주기적으로 고발을 받아 왔다. 1990년대 말에 한 개인 TV 방송 채널이 귤렌이 세속 공화국에 투쟁하여 전복하고 이슬람 국가로 바꿔야 한다고 설교한 비디오 테이프를 방영하면서 그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귤렌의 지지자는 이 비디오 테이프는 그를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해 교묘히 영상과 녹음을 조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했다.[21] 2000년 국가 검사인 육셀은 귤렌과 그 동조자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세속 정부를 전복하여 신정 국가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귤렌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몇 년에 걸친 법정 출정과 상소 끝에 2006년 5월 귤렌 재판은 최종 앙카라의 형사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1999년 귤렌은 심장병, 당뇨병 등 그의 여러 질환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006년 11월, 귤렌은 미국에서 합법적 거주를 인정해주는 영주권을 (“그린 카드”로 알려짐) 신청했다. 미국 이민국은 “특출한 재능을 가진 학자”라는 논거가 영주권을 받기에는 충분치 못하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청을 거부했다. 귤렌의 항소심은 펜실베이니아 동부 지역에 있는 (귤렌 거주지) 연방법원에서 열려, 이민국의 거절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결하였으며, 2008년 10월 귤렌의 영주권 신청은 미국 정부로부터 최종 승인되었다.

위와 같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귤렌은 많은 전세계 수백만의 사람에게 영감이 되어왔다. 그들은 그의 사상에 공명하고, 헌신적으로 소베트에 (지역 서클) 참가, 그의 설교와 저작물을 중심으로 토론하고 그가 고취하는 봉사활동에 시간과 돈을 할애하여 왔다. 다른 한편, 어떤 터키 사람들은 귤렌과 그 추종자들이 터키에 신정 국가를 만들고, 국가의 현대화 과정에서 발목을 잡으며, 젊은이를 귤렌 사상으로 세뇌시키고, 귤렌과 그의 이상에 헌신하는 비밀 단체를 만들려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감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터키 미래의 우환거리가 되는 귤렌의 사상, 신념, 세계관은 과연 어떤 것인가?

[1] 이맘은 보통 모스크나 이슬람 공동체에서 봉사하는 이슬람 지도자를 말하며, 이슬람 예배에서 기도를 인도한다. 국가가 이맘을 각 모스크로 임명하였다.
[2] 페툴라 귤렌.『나의 작은 세계』, 일간지 자만의 Latif Erdogan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 같은 책에서
[4] 모스크와 공공장소에서의 기도는 터키의 세속 정부에서 허용되었지만, 이 시점에 꾸란 학교를 포함, 모든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과 활동은 금지되었다.
[5] 인생의 전반기에 누르시는 다양한 형태로 정치에 참여했다. 스스로 “새로운 누르시”라고 명명한 1920년 이후의 후반기에 반이라는 지방의 외진 곳에 칩거하여 저작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6천 페이지를 넘는 꾸란과 예언자 삶의 이론적 해설서인 “광명의 논문”을 내놓는다. 1850년까지 정치 참여를 거부했으며,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민주당과 귤렌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다. 이는 그의 관점에서 소련의 무신론과 철학적 유물론 또한 그런 이념의 터키내 지지 집단인 공화인민당의 심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6] Yavuz (2005)
[7] Eyup Can, “페툴라 귤렌과의 지평선 여행”, 1995년 8월 일간지 자만과의 인터뷰에서
[8] Agai (2002)
[9] Mardin (1989)
[10] Agai (2005)
[11] Cetin (2010)
[12] Aktay (2003)
[13] 케스타네파자르 (Kestanepazari)는 기숙사 시설의 꾸란 학교로, 학생들은 정규학교를 다니면서 여기에서 꾸란 암송과 이슬람 과학을 추가로 배웠다.
[14] Yavuz (2003)
[15] Kalyoncu (2008)
[16] Cetin (2010)
[17] Bacik, Aras (2002)
[18] Agai (2005)
[19] Cetin (2010)
[20] 같은 책에서
[21] Well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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