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 터키의 이슬람과 국가

페툴라 귤렌

1913년을 시작으로 통일 진보 위원회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샤리아의 완전 폐지를 위한 기반을 다지고 종교 재판소를 세속 재판소의 관할로 종속시켰다. 1915년 샤리아 재판소는 법무부 관할로 들어가, 울레마는 폐지되고 이슬람은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이슬람 재단 소유 재산은 재무부로 이전된다. 1924년 칼리프 제도는 폐지되고, 이슬람 종교 문제를 다루는 국가 관청으로 종교청이 설립되며, 이슬람 신학교 (메드레세) 관리는 교육부로 이관되었다. 종교 목적 이외에는 이슬람력은 폐지되었다. 이제 신생 터키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1881–1938)가 등장할 역사적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1923년, 아타투르크가 이끄는 일단의 청년들은 서구 열강의 지원으로 침략한 그리스 군에 저항 전쟁을 벌여 동부 트레이스와 아나톨리아 전 지역의 주권을 회복하고 터키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아타투르크의 주요 목표는 오스만 제국과는 전혀 다른 국가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특히 정치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세속적, 민족주의적 국가의 건설이었다. 아타투르크를 지도자로 한 신생 공화국의 엘리트는 낙후된 국가를 벗어나기 위해 완전한 근대화를 추구하고, 예전 정부나 낡은 생활방식과 관련되는 것은 모두 나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종교와 종교기관을 의심스럽게 보았으며, 현대 문명과 상치되는 것으로 간주했다.[1] 아타투르크와 추종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다민족, 다종교, 이슬람 중심의 가치관에서 탈피,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터키 민족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2]

노회한 정치인이었던 아타투르크는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처음에는 이슬람을 특히 유럽 군대의 침략에 반대해서 국민을 통합하고 동원하는데 이용했다.[3] 1924년에야 비로서 이슬람 대신 터키 민족주의가 터키 국민을 단결시키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선언한 것이다.[4] 국가는 군대, 학교, 미디어를 활용하여 터키의 국가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이슬람과 오스만 유산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 이슬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승 숙소와 수피즘을 폐쇄하고 그들의 예식, 예배를 금지하고 종교 복장을 불법화했다. 아타투르크는 페즈는 낙후된 사람들이 쓰는 모자로, 여자의 베일은 여성의 종속적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매도했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에잔은 아랍어 대신 터키어로 낭송되고, 아랍어 꾸란은 금지시되고, 터키어 번역판도 아랍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바뀌어 인쇄되었다. 서구화와 근대화를 위해 아랍 문자는 라틴 문자로 대체되고 이슬람력 대신 그레고리력이 채택된다. 또한 그는 여성의 평등권을 주창하고 1934년에 터키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공화국은 1928년 헌법상 이슬람은 터키의 국교가 아니라고 공표한다. 이슬람이 아직 터키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이로서 이슬람의 정치에서의 중심 역할은 종말을 고한다. 1937년, 헌법에서 세속주의 원칙은 실질적으로 이슬람을 대체하게 된다.

[1] Yilmaz (2005)
[2] Fuller (2008)
[3] Balci (2007); Yavuz, Esposito (2003)
[4] Yavuz (2005)는 터키가 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상호 모순적 역설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즉, 한편으로 국가는 여러 민족/언어 집단의 단결을 위해 이슬람을 이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과 반대되는 발전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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